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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UR제도의 허와 실

jean pierre 2008. 2. 14. 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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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거없는 약물 사용 평가 제도



   근거가 없는데도 막연한 희망에 기대 정책을 추진하면 실패하기 마련이다. 특히, 사안과 쟁점의 다기(多岐)함에 애써 눈을 감거나, 정치적 의도가 지나치면 그 결과는 뻔하다.
 
  정부는 2004년 7월부터 '약물 사용 평가(Drug Use Review, DUR)'라는 제도를 실시해 오고 있다. '병용 금기' 또는 '특정 연령대 금기'라고 이름 붙여진 280여 개의 경우를 미리 정해 놓고, 전산 심사를 거쳐 의사의 처방이 조제로 곧바로 연결되지 못하도록 한 게 이 제도의 골자.
 
  논리는 단순하다. 서로 함께 쓰면 안 되는 약들의 조합이나 소아처럼 특정 연령군에 쓸 수 없는 약이 미리 컴퓨터에 입력돼 있다. 만일 기준을 어기는 처방이 나오면 경고 메시지가 뜨고, 약사는 처방을 낸 의사에게 문의한다. 의사가 처방 변경에 동의하지 않으면 그 내용이 기록으로 남는다. 기회를 놓칠세라,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은 '근거가 없다'며 진료비 삭감의 칼을 휘두른다.
 
  모든 게 아귀가 맞고 그럴 듯해 보이지 않는가? 정부가 DUR을 "의약품의 처방이 적절하고 의학적으로 필요하며, 부정적인 의학적 결과를 낳지 않을 것을 보장하기 위한 제도 또는 시스템"이라고 주장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러나 문제는, 정부의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할 실증적 근거가 거의 없다는 사실이다. 1990년 이래 미국은 메디케이드 환자를 대상으로 후향적 DUR을 실시해 왔다. 그런데, 직접 조사해 보니 정부가 기대했던 효과 중 실제로 입증된 게 하나도 없었다(Hennessy S, 2003). 우선, DUR을 도입해 부적절한 처방이 줄었다는 증거가 관찰되지 않았다. 더군다나 정작 중요한 효과인, 환자의 건강이 증진됐다는 증거도 찾을 수 없었다.
 
  현재 국내에서 실시 중인 전향적 DUR의 경우는 문제가 더 심각하다. 일단, 제대로 된 연구방법론을 사용해 정책 효과를 검증한 논문이 딱 한 편뿐이다(Chrischilles EA, 2002). 그나마 '전향적 DUR로 의약품 치료가 개선되거나 건강이 증진된다는 증거를 찾을 수 없었다'는 결론이 얻어졌다. 따라서 이미 전문가들이 다음과 같이 주장한 것은 다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DUR의 효과를 뒷받침할 어떤 타당한 과학적 자료도 없다(Soumerai & Lipton, 1995)".
 
  사실 이 상황은 매우 희화적이다. 정부는 자나 깨나 '근거'를 요구했다. 즉, 본질상 전문인의 경험과 판단에 맡겨야 할 진료를, 근거라는 잣대를 들이 대며 '프로크로스테스의 침대(Procrustean bed)'처럼 획일적 재단을 일삼은 것은 다름 아닌 정부였다. 그런 정부가, 막상 자신들은 영 근거가 부실한 정책을 펴고 있다는 이 모순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DUR, 특히 국내에 도입된 DUR은 처음부터 실패가 예상될 수밖에 없었다. 먼저, 금기 대상을 정하기 위해 정부는 식품의약품안전청의 허가 사항을 제일 큰 기준으로 삼았다.
 
  그러다 보니 매우 우스꽝스러운 상황이 발생한다. 예를 들어, 병용 금기, 즉 서로 같이 사용하면 안 된다고 정부가 지정한 A, B 두 약 중 A의 허가 사항에는 B와 병용하지 말라는 말이 나온다. 하지만, B의 허가 사항에는 A와 같이 쓰지 말라는 조항이 없다. (양기화, 병용 금기 등 의약품 안전 사용을 위한 정책 방향 공청회, 2007년 10월 12일). 자, 매번 '근거'를 외는 정부 관료께서는 이 경우 과연 어느 쪽의 근거를 선택하실 것인가?
 
  지난 연재에서 지적한 대로, 이는 '오프레이블, 즉 허가 사항 외로 약을 사용하면 불법'이라는 잘못된 인식 때문에 빚어진 촌극이다. 의약품이 어떻게 개발되는지 조금이라도 이해했다면 이런 어처구니없는 기준을 적용할 리 없다. 요컨대, 식약청은 단지 제약회사가 제출한 자료에 근거해 '예, 아니오' 만을 결정한다. 따라서 B를 개발한 제약회사가 A와의 병용 유무에 대한 자료를 제출하지 않으면 당연히 B의 허가 사항에는 A에 대한 내용이 들어가지 않는다.
 
  함께 쓰지 말라는 것도 그렇다. 물론, 항진균제인 케토코나졸과 항히스타민제인 터페나딘의 병용처럼 치명적인 부정맥을 일으켜 환자를 위험에 빠트릴 개연성이 충분한 경우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은 환자를 진료하는 전문인의 판단에 따라 조심스럽게 사용해야 한다는 의미다.
 
  한 몫 거든 통합민주당 장복심 의원의 주장은 더 기이하다. "금기 의약품이 3년 동안 약7만 여 건이나 처방돼 약화 사고로 이어질 위험한 상황이다(금기약물 처방 행태 보도자료, 2007년 9월 6일)."
 
  장 의원이 예로 든 금기 의약품의 처방 중 절반이 넘는 3만 6000여 건은 영아나 유·소아 등에게 사용된 약물이다. 의약품 개발 과정에서 어린이가 연구 대상에 포함되는 경우는 드물다. 따라서 허가 사항에 이들에 대한 자료가 없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장 의원 말대로라면 나이 어린 환자는 치료하지 말아야 한다. 식약청의 허가 사항을 기준으로 '특정 연령대 금기'를 정하는 것이 왜 비과학적인지 또 드러난다.
 
  황당한 일은, 장 의원이 전문직 비례 대표로 등원했다는 사실이다. 사족이지만, 이 직능 단체가 올해 총선에서는 검증된 전문가를 비례 대표로 추천했으면 좋겠다. 그래야 잘 하고 계신 다른 분들마저 도매금으로 넘어 가지 않을 터.
 
  DUR이 제대로 운영되지 못하는 더 중요한 이유가 있다. 컴퓨터 스크린에 뜬 경고 메시지를 제대로 평가하려면 환자의 전반적인 임상 정보를 꿰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경고가 정말 의미 있는지, 아니면 그냥 무시해도 좋은지 판단할 수 있다. 하지만, 현재 국내 DUR에는 연령이나 성별 같은 최소한의 정보만 담겨 있다.
 
  환자의 임상 정보를 파악할 수 있게끔 시스템이 개선되더라도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왜냐 하면, 경고 메시지를 해석해야 할 일차적 책임이 있는 약사 직종이 임상적 의사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훈련받지 않았기 때문. 그러니, 환자를 배제한 상태에서 의약품만을 겨냥한 제도가 제대로 운영될 리 없다.
 
  이처럼 주장하는 효과를 입증했다는 근거도 없고, 기준도 과학적이지 못하며, 제도를 운영할 인프라도 돼 있지 않은데 왜 정부는 DUR을 밀어붙이는 것일까? 정부가 의사의 진료권을 제한하는 환경을 조성해 보험 재정을 챙기려 한다는 비판이 그래서 설득력을 갖는다.
 
  하지만 명심하자. 본질적으로 환자가 아닌 제품(의약품)에만 초점을 맞춘 보건의료 정책은 하책 중의 하책이라는 것을. 근거가 부실한 '약물 사용 평가'는 중지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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